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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훈의 사진과 김상집의 평전으로 가는 ‘5월 그날의 현장’

세계보도사진가상(World Press Photo)을 세 번이나 수상한 한국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 성남훈이 윤상원 열사의 행적을 사진으로 쫓았다. 성남훈의 예리하고 서정적인 사진의 시선은 ‘오늘의 공간’에서 ‘그날의 현장’을 불러내, 그날의 창 앞에, 그날의 함성 속에 우리를 서게 한다. 80년 5월 항쟁 당시 녹두서점에서 윤상원과 함께 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했던 동지이자 친우 김상집이 쓴 <윤상원 평전>이 사진과 함께 한다.

성남훈

성남훈(1963~)은 프랑스 파리 사진대학 『이카르 포토(Icart Photo Ecole de Paris)』에서 다큐멘터리를 전공, 프랑스 사진에이전시 『라포(Rapho)』의 소속 사진가로 활동하였고, 전주대학교 문화산업대학원 객원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온빛다큐멘터리 회장과 사회공익적 사진집단 『꿈꽃팩토리』를 이끌고 있다. 1992년 르 살롱 최우수사진상, 2004년 강원다큐멘터리 작가상, 2006년 한미사진상, 동강사진상, 1999년과 2009년에 월드프레스포토상, 2017년 일우사진상을 수상하였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올림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예송 미술관, 영월사진박물관, 타슈켄트 국립사진센터, 국가인권위원회, 갤러리 와, 스페이스22등 다수의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도청 분수대

학생 수습위원회 기획 위원 이양현이 분수대에 올라갔다. 이양현은 “우리 시민군은 민주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성들과 고등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셔서 살아남아 역사의 중인이 되어주십시오”라고 마무리 짓고 분수대에서 내려왔다. 순간 분수대 광장은 고요했다. 계엄군이 쳐들어올 거라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결사 항전하겠다는 학생수습위원회의 결연한 의지가 분수대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시민에게 공식적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도청 민원실

맨 앞 창문에 민주투쟁위 대변인 윤상원이 서고 바로 뒤 창문에서는 민주 투쟁위 기획위원 이양현이 창문 밖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 뒤 창문을 민주투쟁위 기획실장 김영철이 지켰다. 이양현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침묵을 깨고 윤상원에게 말했다. “자네하고 함께 했던 그동안의 삶이 즐거웠네.” 윤상원은 뒤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이제 우리 저승에서 만납시다. 저승에서도 사회운동을 계속 합시다.”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윤상원이 M16에 하복부를 맞아 쓰러지고 그 뒤에 있던 이양현과 좌측의 김영철이 윤상원을 부축하여 회의실 안으로 데려왔다. 당시 민원실 회의실은 시민군의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면서 밤에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쪽잠을 자기도 하는 곳이었다. 이양현은 김영철과 함께 바닥에 이불을 깔고 윤상원을 그 위에 눕혔다. 윤상원은 의식이 없는 채 왼손으로 총에 맞은 하복부를 꾹 누르고 있었다.

 끌려 나온 이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민원실 2층의 테라스 곁으로 소나무 한 그루가 솟아 있었는데 공수들은 사로잡은 시민군들에게 그 소나무를 타고 내려가라고 명령했다. 그러지 않으면 여기서 죽이겠다는 말에 김영철이 먼저 소나무를 타고 내려갔고 이어서 이양현과 사로잡힌 시민군들도 차례차례 소나무를 타고 내려갔다. 소나무 밑에서는 공수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내려오자마자 손과 발을 묶고 발 사이로 포승줄을 걸어 목이 뒤로 젖히도록 단단히 당겨 묶었다.

노동운동

이양현은 윤상원에게 한남플라스틱에 취직할 것을 권유하였다. 들불야학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윤상원은 야학보다는 공장 취업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동안 겨레터야학뿐만이 아니라 여러 교회나 성당의 야학을 둘러본 적이 있어 야학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특히 광민사 대표 이태복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노동 현장에서 일할 결심이 확고하던 시점이었다.

야학

그동안 외롭게 빈민운동을 해왔던 김영철은 자기 동네에 들불야학이 창설되는 것을 보면서 우군을 만난 듯 기뻤다. 더구나 듬직한 윤상원이 자신이 계획하는 사업에 참여한다면 더욱 큰 성과가 있을 듯 싶었다. 1978년 11월, 윤상원은 광천동 시민아파트의 방 한 칸을 사글세로 빌려 들불야학 학생 백재인과 함께 살게 되었다. 거처를 옮김과 동시에 윤상원의 방은 들불 교사들과 학생들의 새로운 모임터가 되었다.

상무대 영창

끌려간 곳은 화정동에 있는 505보안대 지하실이었다. 컴컴한 지하실 복도에는 벌써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이 낭자했다. 밤새 혹독한 취조를 받고 넘겨진 곳은 상무대 영창이었다. 상무대 영창에는 예비검속된 정동년 (전남대 복적생), 김운기(조선대 복적생) 박현선(민청학련) 문덕희 (민청학련), 윤목현, 박선정(전남대 인문사회대학 학생회장) 등과 5월 18일 녹두서점 앞에서 연행된 김천수(전남대 학생) 등이 잡혀와 있었다.

생가

윤상원은 1950년 8월 19일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에서 아버지 윤석동 씨와 어머니 김인숙 씨 사이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완성되다
다시 1982년 4월 17일, 김종률은 그동안 작곡한 노래집과 기타를 들고 운암동에 있는 황석영의 집을 찾았다. 황석영은 모인 좌중에게 ‘5.18민중항쟁 2주기를 맞이하여 문화패인 우리가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문을 뗐다. 김종률은 그 자리에서 지난 2월 말에 윤상원과 박기순이 영혼결혼식을 치렀다는 것을 알았다. 한참을 논의한 뒤 일행은 민주주의를 외치다 계엄군의 흉탄에 스러진 영령들을 위로하는 ‘넋풀이’ 노래굿을 만들기로 했다. (…중략)

당시 일행 모두는 황석영이 <임을 위한 행진 곡>의 가사를 작사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사의 구절구절이 백기완 시집 <젊은 날>에 수록된 ‘가신 님’, ‘우리들의 합창’ 속에서 발췌한 것이라 그때부터 ‘백기완 작시作詩’라고 노래책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0년12월에 나온 시집 《젊은 날》의 증보판에 <묏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라는 장시가 실림으로써 이 노래의 가사가 백기완의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이 시의 삽입 노래 형식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가 거의 그대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에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리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윤상원 평전

이 책은 역사를 바꾼 윤상원과 결사항전 주역들의 이야기다.

인사말

윤상원의 삶과 그 날의 기록

하성흡의 수묵으로 그린 윤상원 일대기

성남훈의 사진과 김상집의 평전으로 가는 '5월 그날의 현장'

열사의 일기로 보는 노동운동가 윤상원

김지욱의 영상으로 듣는 5인의 ‘그날의 증언’

쿤낫, 주용성의 아시아 현장 사진전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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